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 1992년)은 그저 흘러가서 좋았습니다. 가족을 잃고 먹먹한 가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흐르는 강물이 이들을 수시로 보듬어 줍니다. 궁극에는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이 강물과 닮아 있음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의 강은 ‘치유’일 겁니다. 



영화는 포스터로도 유명합니다. 허공 위로 출렁대는 ‘플라잉 낚시줄’의 춤사위는 숨막히도록 아름다웠습니다. ‘언어의 연금술사’라고 칭해지는 파울로 코엘료에게 ‘강’은 ‘삶’과 같은 말인 듯합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Like the Flowing River, 2008년)이란 제목의 산문집에서 그는 주변으로부터 듣거나 직접 본 백한 가지 에피소드를 들려줍니다. 숨진 어머니를 화장시켜 세계 각국으로 여행을 보내는 어느 아들의 이야기며, 숨진 지 20여년 만에 발견된 어느 파자마 차림의 도쿄 남자 이야기 등이 나옵니다. 각기 달리 흘러갔던 ‘삶’을 읽다 보면 하나씩 지혜가 느는 듯하여 흐뭇하였습니다. 모두의 삶은 결국 이치대로 흘러갔습니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폴이 낚시를 하는 장면 (경향신문DB)



어쩐 이유에선지 가요에서의 ‘강’은 유독 슬픈 색깔을 머금습니다. 밝은 노래는 정말 드물게 있을 뿐입니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갑자기 떠오른 생각인데 옛날 어르신들은 젓가락, 혹은 숟가락을 가지고서 어떻게 그럴듯한 비트를 만들어낼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젓가락과 숟가락이 드럼과 퍼쿠션이었습니다.



이 노래는 작고한 김정구가 1936년 발표해 국민가요가 된 ‘눈물젖은 두만강’입니다. 강은 온통 눈물로 얼룩져 있습니다. 



여기서의 ‘강’은 그리 단순히 해석될 소재가 아닐 것입니다. 1930년대 문학과 대중음악에서 자주 ‘두만강’이 등장하는데 대체로 민족의 수난을 상징하는 단어로 표현됩니다. 어느 신문의 1면 기사와 달리 ‘황국신민’을 거부한 많은 이들이 국토의 끝, 두만강을 넘어 정처없이 떠돌았지요. 말 달리며 항거한 단단했던 독립운동가들도 강과 맞닿은 곳에 터를 잡았습니다. 



은방울 자매의 ‘영산강 처녀’에서의 강도 ‘이별’과 ‘기다림’입니다. ‘굽이 도는 푸른 물결/ 다시 오건만 똑딱선/ 서울 간 님 똑딱선/ 서울 가신 님 기다리는 영산강 처녀…’하며 흘러갑니다.



‘백마강’ ‘임진강’ ‘남강’ 등도 죄다 그러합니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잊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에 울어나 보자’하던 게 배호의 ‘꿈꾸는 백마강’이고,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강 건너 갈밭에선 갈새만 슬피 울고’ 하며 노래되는 게 양희은의 ‘임진강’입니다. 



‘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시집살이 삼년 만에/ 시어머니 하시는 말씀/ 얘야 아가 며늘 아가/ 진주 낭군 오실 터이니 진주 남강 빨래가라…’하며 시작되는 ‘진주 난봉가’ 속 남강은 슬프다 못해 처량하기까지 합니다. 낭군은 도통 아내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황금심의 경우엔 ‘앞강물’에서 강을 직접적으로 ‘눈물’로 비유하더군요. ‘흘러 흘러 넘치는 물로도/ 떠나는 당신 길을 막을 수 없거든/ 이내 몸 흘리는 두 줄기 눈물이 어떻게 당신을 막으리까…’ 하며 노래합니다. 



우리네 강이 온통 슬픈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을 겁니다. 길이 끊기는 곳, 그래서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일 터이지요. 



요즘의 강은 어쩐 일로 예전보다 더 서글픈 빛을 머금는다 싶습니다. 물줄기는 온갖 보로 가로막혀 있습니다. 막힘은 필시 아픔을 일으키는 데도 말입니다. 현란한 수치와 수사로 혼동을 의도했겠지만, 결국 일은 강물처럼 매듭되기 마련일 것입니다. 온통 생채기 투성이의 강이 제 물줄기 그대로 흐를 그날이 어서 오길 기원합니다.

Posted by 강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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